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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이명수의 충분한 사람] 김영은 '우리동네 공부방' 센터장
2019.01.07 페이스북 트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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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1 [2014.09.15 제1027호]

 

  

오, 놀라워라! 마을공동체의 따뜻한 힘   

 

 

[이명수의 충분한 사람] 마을에서 촛불켜며 이웃들과 세월호 참사의 아픔 함께 나누고
안산의 아픔 치유해가고 있는 김영은 ‘우리동네 공부방’ 센터장

 

 

 

자신의 인터뷰를 읽으며 본인이 세월호와 관련해 ‘닥치는 대로’ 했던 일들이 어떤 의미였는지 돌아볼 수 있었다는 소설가 신혜진의 문장은 한 편의 수필처럼 아름다웠다. 자신을 위해 켰던 불빛이 인터뷰를 거치며 촉수 낮은 가로등이 되고 그 흐릿한 불빛을 바라보던 이들이 새롭게 불을 켜서 산속 ‘먼 곳의 불빛’처럼 자신을 계속 걸어갈 수 있게 해주었다는 고백은 더 아름다웠다. 그녀가 선물한 밀랍초 불빛 아래서 그 말을 들으며 위로와 힘을 얻었다.

그래서 이번엔 ‘먼 곳의 불빛’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실감하게 해주는 이를 수소문 끝에 만났다. 금요일 저녁마다 ‘동네촛불’을 밝히고 있는 ‘우리동네 공부방’(경기도 안산시 일동 지역아동센터) 센터장 김영은씨다.



공부방·공동체·촛불의 삼각편대



 
 
 
≫ 김명진 기자
 

순전히 치유적인 관점에서 성급하고 주관적인 느낌으로 결론부터 말하자. 그의 말을 들으면서 세월호 트라우마 해법의 단초를 발견한 느낌이다. 지역에 깊게 뿌리내린 ‘동네 공부방’과 긴밀한 ‘마을공동체’, 이웃의 간절함이 담긴 ‘동네촛불’은 삼각편대처럼 막강했고 유기적이었다. 일상에 바탕을 두고 있어서 쉽게 무너지지 않고 오래가겠구나 예감했다.

대지진 뒤 일본 정부에서 생존자가 많은 마을과 그렇지 않은 마을의 요인을 분석한 적이 있다. 연구 결과 공동체 연결이 활발했던 마을은 생존율이 높았고 그렇지 않은 마을은 낮았다. 그 뒤 정부는 재난시 안전망 구축 사업의 핵심을 마을공동체 복원 사업으로 정하고 예산과 인력을 거기에 투입했다. 그런 분석과 진단, 액션 플랜은 놀랍고 부럽다.

세월호 트라우마를 치유할 수 있는 해법의 실마리도 거기에 있다고 나는 느낀다. 세월호 트라우마의 파괴력은 생각보다 깊고 넓다. 이웃들이 함께할 수 있어야 본격적인 치유가 시작될 수 있다. 현미경과 망원경이 동시에 필요한 일이 있듯 진상 규명을 위한 세월호 특별법 제정 촉구 같은 가열찬 투쟁의 한켠에서 섬세한 이웃 치유자들의 역할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안산이라는 지역의 치유적 공기는 세월호 트라우마를 해결하는 데 절대적이다.


그런 점에서 동네 공부방 아이들과 부모들을 중심으로 마을공동체를 바라보고 그에 대한 통찰과 열정이 넘쳐나는 김영은의 말들은 많은 영감을 주었다. 양이 넘쳐 다 소화하지 못할 걸 알면서도 과식하는 사람처럼 평소의 배에 가까운 시간을 할애해 그의 말을 들었다. 김영은 혼자 말했지만 함께하는 공부방 사람들, 엄마모임·아빠모임 사람들, 동네촛불 집회를 주도하는 사람들이 음성다중으로 말하는 듯해서 나도 내내 그렇게 들었다.


-안산에 사신 지 얼마나 되셨어요.

=대학 다니다가 혼자 불쑥 내려와서 벌써 22년 됐네요. 결혼도 여기서 했고 딸아이 둘도 여기서 낳고 키웠으니까 고향이나 마찬가지죠. 제가 안산에서 네 동네 정도 살아봤는데 자기 동네에 대한 애정은 여기 일동 사람들이 제일 많은 거 같아요.


-본인이 오래 살고 있는 동네라서 그런 건 아닌가요.

=아니요. 여기는 실제로 그런 이웃들이 많아요. 제가 이 동네에 온 지 10년 됐는데 우리 둘째아이가 아토피가 너무 심해서 맞는 환경이 아니면 아이를 살릴 방법이 없겠구나 싶을 절박한 때였어요. 단독주택도 얻을 수 있는데다 뒤에 산이 있더라고요. 다른 곳은 갯벌을 메워서 만들었는데 일동은 육지와 맞닿아 있다 하고요. 게다가 공동육아를 하는 어린이집이 두 군데나 있는 거예요. 여러 가지가 딱 맞았죠.



마을공동체에서 아이를 키운다는 것


-그런 정도면 이리로 이사오면서 바뀐 게 많았겠어요.

=그럼요. 제가 완전히 바뀌었어요. 그 전에 알고 있었던 건데 바뀌지 못했던 것들이 여기서는 달라져요. ‘마을’은 관계의 망이 핵심이라고 생각하는데 여기는 그게 피부로 느껴지거든요. 예를 들어, 일자리를 찾아 다른 도시로 갔다가 아이들을 믿고 맡길 데도 없고 그 외 여러 이유로 다시 돌아오는 이웃들이 있어요. 여기가 주는 믿음이나 위로 그런 것 때문에 다시 돌아왔을 거고 또 가려고 하다가 주저앉은 사람도 있을 테죠. 마을이 되려면 관계의 지속성이 있어야 하고, ‘내가 여기서 뭘 해보자’는 미래에 대해 얘기하려면 여기서 계속 살 생각이 있어야 하잖아요. 여기서는 그게 되는 거죠. 좋은 사람들과 오래 눌러앉아 살다보면 그게 뭔지 저절로 알게 돼요.


그의 말은 마을 홍보대사의 오버액션 수준이 아니라 입에 착 감기는 묵은 장맛 같았다. 위험사회의 유일한 대안이 마을공동체라는 말의 의미를 곱씹었다.


-현재인데 미래인 거 같네요. 현재지만 우리가 미래에 꿈꾸는 소중한 것들이 다 담겨 있는 느낌이에요. 거기엔 ‘우리동네 공부방’(일동 지역아동센터)의 영향이 절대적이겠어요. 본인의 삶을 결정적으로 바꾼 변곡점 두 개 중 하나가 그 공부방이라고 했을 정도니까.

=네. ‘우리동네 공부방’은 제게 그렇죠. 2006년에 월세 5만원짜리 지하 단칸방에서 아이들 9명으로 시작한 방과후 학교예요. 해보고 싶은 일이거나 재미있어서 시작한 일이 아니에요. 여기는 지금도 대개 맞벌이예요. 외벌이가 별로 없어요. 저도 일을 해야 했는데 큰아이를 맡길 데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똑같은 고민을 하던 일곱 집이 머리를 맞대다 직접 해보기로 한 거죠. 큰딸아이는 지금 고2인데 여기 공부방을 다니면서 컸죠. 초등학교 6학년인 둘째도 마찬가지고요.


-삶과 꽉 맞닿아 있는 곳이네요.

=그럼요. 학교가 여기 있으니까 동네 친구가 학교 친구고, 이웃이고 부모고 그런 거죠. 저희가 ‘우리동네 공부방’을 준비하는 반년 동안 별별 얘기를 다 했어요. 애들을 어떻게 키웠으면 좋겠는지 ‘가지고 있던 꿈을 다 얘기해보자’ 그랬죠. 그래서 정리된 게 아이들이 재밌게 놀 수 있는 곳이었으면 좋겠다, 다들 맞벌이니까 기본적인 공부는 봐줬으면 좋겠다, 예술교육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친환경 먹거리면 좋겠다. 그런 게 뼈대가 됐어요. 우리 공부방에는 부모들이 참여하고 논의할 수 있는 구조가 많이 있어요. 방별 소단위 모임에서는 아이들 지내는 소소한 얘기를 하고, 전체 부모 회의에서는 운영 전반에 대한 사안을 같이 의논하고 결정해요. 처음부터 지금까지 저희는 마을공동체 안에서 아이를 키웠으면 좋겠다는 지향점이 뚜렷해서 그 원칙에 입각하고 있죠.



붙잡고 함께 울기만 해도 얻는 위로


-아이 하나를 키우려면 온 마을의 힘이 필요하다는 속담이 실감납니다.

=그 과정에서 어른도 함께 성장하는 거 같아요. 저 같은 경우엔 지역아동센터 교사를 하면서 많이 변화하고 성장하고 깨지고 열렸거든요. 정말 다양한 아이들이 있잖아요. 아이들이 뭘 하든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은 확고한데 아직도 어떤 부분에서는 여전히 제 고집대로 하고 싶은 때가 있어요. 하지만 제가 계속 변화하려는 마음을 잊지 않으면 결국엔 아이들을 존중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은 있어요.


빙고! 김영은 개인의 육성이 아니라 ‘우리동네 공부방’ 엄마·아빠들이 들려주는 집단지성의 합창인 듯해서 어떤 교육철학보다 요긴하게 새겼다.


-교육철학에 대한 얘기를 하다보면 ‘어떻게 하면 잘 사는 건가’를 생각하지 않을 도리가 없잖아요.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동네 공부방’이 일동이라는 지역사회의 심리적 베이스캠프 역할을 하는 부분이 있겠다 싶어요.

=그런 부분도 있을 거예요. 공부방이 지역아동센터가 되고 정부 지원을 받으며 한시름 놓게 되니까 ‘아차, 우리가 아이들을 마을공동체 안에서 키우고 싶어 했지’ 그게 다시 생각나면서 마을공동체 사업에 관심을 기울였어요. 아빠모임이랑 엄마모임도 만들고 골목상권을 고사시키는 대기업 슈퍼마켓 반대 시위 같은 것도 했죠.


-세월호 동네촛불도 그런 마을공동체 차원에서 시작했겠군요.

=네. 우리 지역의 일이니까요. 안산 25시 광장에서 하던 대규모 촛불집회가 정리되면서 지난 5월 말부터 동네 식물원 앞 광장에서 시작했는데 처음엔 우리동네 지역아동센터 교사들 중심이었어요. 교사 전원이 너무 충격받고 슬퍼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태였거든요. 교사들이 느끼는 두려움과 분노, 슬픔 이런 것도 문제였지만 아이들에게 세월호 얘기를 어떻게 전달하고 안심시키느냐는 것이 더 큰 과제였죠. 저희가 아이들에게 항상 ‘놀이는 생명활동이야’ 하면서 노는 걸 강조했는데 갑자기 그런 것들이 위험해 보이고 주변 환경 자체가 엄청난 중압감과 위압감으로 느껴지는 거예요. 세월호 관련 얘기만 나오면 계속 울고. 그러다 뭐라도 해야겠다 해서 모여본 거죠.


-뭘 했나요.

=첫날은 한 30명 정도 모였어요. 동네 반바퀴를 침묵행진한 뒤 광장에 모여 발언도 하고 동영상도 보고 시낭송도 하고 그랬어요. 엄마·아빠들과 산책 나온 사람들, 지나가는 사람들. 다 아는 사람들이죠. 모여서 정말 많이 울었어요. 말하는 사람도 울고 보는 사람도 울고 같이 운 거예요. 울기만 하다 끝난 거 같아요. 끝나고 나서 평가를 했죠. 그런데 너무 위로가 되었다는 거예요. 두려움도 줄어들고 불안하지 않다는 거예요.



세월호, 공동체의 문제로 떠안아야


-왜 그런 거 같으세요.

=자체 평가하기론 이웃끼리라서 그런 것 같아요. 이웃한테 받는 위로가 따뜻하고 안심이 많이 됐으니까요. 궁극적으론 아직도 누군가 세월호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게 중요하죠. 이제 다 잊은 거 같고 아무것도 없는 거 같지만 저 밑바닥에 있는 세월호를 ‘아, 세월호’ 하고 꺼낼 수 있는 게 촛불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요즘 ‘세월호 막말’이라는 단어가 인간의 추악한 본성을 민낯으로 드러내는 상징어처럼 생각됩니다. 일동 동네촛불 집회에선 그런 일이 없나요.

=한 번도 그런 일 없었어요. 동네촛불에 못 나오는 엄마나 아빠들도 있을 거잖아요. 본인들이 못 나오는 것은 근무 때문이거나 아이가 어려서라며 미안해하세요. 그러면서 누군가 외면하지 않고 촛불을 드는 것이 고맙다며 나중에 자기도 나올 테니 계속했으면 좋겠다고 하세요.


-세월호 유가족들도 그렇지만 일반 시민들도 다른 사람을 만날 때 상대가 세월호 막말을 할지 몰라 긴장감이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던데 그런 긴장과 불안이 전혀 없나봅니다.

=없어요. 세월호가 터지고 나서 친구들이 안산에 많이 찾아왔어요. 오랫동안 연락이 없던 친구인데 일부러 안산으로 찾아와 위로하고 같이 아파하고 울어주는 거예요. 한동안 제가 상주가 된 느낌이었어요. 저는 그 사람들이 되게 고마웠어요. 아이들 데리고 캠프 갔을 때도 안산에서 왔다고 하면 상황이 어떤지 물어보고 얼마나 힘드냐며 따뜻하게 위로해주는 분이 많아요. 시댁이나 친정에 가도 ‘아까워서 어쩌냐’며 함께 울어주시고 많이 힘들겠다고 다독여 주세요.


세상의 험한 기운으로부터 동떨어져 살아온 동막골 사람들이 자기들끼리처럼 외지인들을 스스럼없이 믿어주는 모습이 떠올라 가슴 한켠이 찡했다. 마을공동체가 가진 힘이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세월호 트라우마 같은 엄청난 일도 마을공동체가 함께 안고 가야 할 일상적인 일로 받아들여주는 듯해서 많이 안심이 돼요.

=이웃의 아픔이나 슬픔을 어떻게 외면해요. 외면하지 못하죠. 여기엔 그런 이웃이 많아요. 어떤 일이 생겨서 그때부터 사람들을 모아서 대책 세우고 그러는 게 아니라 옆에 있는 사람에게 우리 같이 슬픈데 뭐할까 물으면 바로 나서는 거죠. 혼자서는 못할 일인데 여기선 ‘함께하자’고 하면 옆에 한 명 서주고 두 명 서줘요. 얼마나 힘이 돼요. 그러다보면 어느새 불어나 있고 그래요. 세월호로 인한 분노와 슬픔, 두려움은 아직 있지만 세월호를 잊지 않기 위한 노력을 어떻게 지속할까 고민 중이에요. 세월호가 나 아닌 딴 사람의 문제라고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고 공동체의 문제로 떠안을 수 있는 사회가 되게 하려면 지금부터라도 끊임없이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동네촛불은 규모가 작아도 힘이 엄청날 수밖에 없다. 내 마을의 일로, 일상으로 파고든 위로와 연대를 무슨 수로 당하나. 일 터지면 소집되는 민방위대가 상설조직인 소방서를 능가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세월호 이전과 이후 달라진 게 있나요.

=세월호가 터졌을 때 느낀 제일 큰 감정은 미안함이었어요. 사회가 이렇게 변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의미 있게 나를 전부 바쳤던 시절도 있었는데 세상이 하나도 안 바뀐 거 같은 거예요. 내가 뭔가 한 거 같은데 결국 하나도 바꿔놓지 못했구나 하는 자괴감에 괴롭죠. 그러니까 세월호 전후로 나눈다기보다 ‘그동안 내가 어떻게 살았지’ 그런 생각을 하는 강력한 계기가 된 거 같아요. 그냥 그냥 살면서 달려가다가 뒤를 획 돌아보는 느낌 있잖아요. 잘 산 거 같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동네촛불을 하면서 공동체에 대한 열의가 다시 생겼다고 할까. 다시 잘해보면 좋겠다 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촛불이 곳곳에서 꺼지지 않는 사회


충분히 잘하고 있는 거 같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주제넘은 짓 같아서 가만히 그의 말을 들었다. 마을공동체가 유일한 대안이고 해법이란 사실만큼은 명확해지는 느낌이었다. 동네촛불이 전국 곳곳에서 꺼지지 않을 수 있는 사회가 되면 혼자선 감당할 수 없는 슬픔과 고통도 종내엔 이웃 치유자들의 힘으로 견뎌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동네 공부방’에선 아이들이 모든 선생님을 별명으로, 반말로 부른다고 했다. 김영은의 별명은 시냇물이다. 시냇물 소리가 좋아서 별명을 그렇게 지었다는 말을 듣다가 그에게 들려주고 싶은 시 한 구절이 떠올랐다.


“물돌물 돌물돌/ 물이 흘러갑니다// 함께 가자/ 함께 가자// 어린 물이 어르며/ 어른 돌을 데리고 흘러갑니다// 모래무덤 끝으로/ 그리움으로” -서정춘 ‘동행’


그런 동행이라면 기꺼이 길동무할 마음 충만하다. 세상은 그런 이웃 치유자들로 차고 넘친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버티고 있는 것이다.

 


이명수 심리기획자, 녹취 이영하 시민활동가